큐레이팅 글




김우진



제주어로 바라본 언어의 이면

  언어는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나타나는 실체이자 관념이자 뺏기거나 빼앗기기도 하는 도구로, 체제나 문화를 구성하며 다양한 역할을 수행한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언어는 동일하게 위치하기보다는 지배하는 언어와 지배당하는 언어로 나뉜다. 이로 인해 언어는 위계질서와 계급, 소외, 그리고 생존 도구로서 기능한다.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의 문화는 관습화된 풍습이고, 그 언어는 문화를 담고 있는 그릇이다. 

  제주어는 최근 유네스코에 의해 소멸 위기 언어로 지정되었다.[1] 언어의 소멸은 크게 언어를 더이상 사용하지 않거나, 언어에 대한 부정적 생각을 갖거나, 의사소통 사용자가 감소하거나, 세대 간 전승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발생한다. 제주어를 구사하는 세대는 주로 노년층으로, 1950년대 이전에 태어난 사람들이 주로 사용하고 있어서 극심한 소멸 위기에 처해있다. 특히 제주도민들도 세대별로 제주어에 대해 인식하는 바가 다르다 보니, 그들에게 제주어는 표준어 다음으로 사용하는 두 번째 언어로 자리매김한다. 이로 인해 제주어를 사용하는 도민들이 고립되는 현상이 심심찮게 드러나고 있다. 

  제주어는 한국어 안에 내포된 타지역의 방언과는 조금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있다. 그 이유는 섬이라는 지리적 특징과 더불어 몽골어, 일본어, 한자어의 영향을 많이 받아온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최근에는 ‘제주 방언’ 대신 ‘제주어’라는 명칭 표기를 통해 표준어와 지역어 간의 내제된 불평등을 해소하고자 하는 등 하나의 언어로서 기능하고 있음을 공고히 한다. 작가가 여러 소수 언어 중 제주어를 주제로 삼은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라도 보인다. 한 나라 안에서 같은 언어를 사용하더라도 지리적, 문화적 차이에 따라 방언이 생겨나는 현상은 흔한 일이다. 그러나 같은 뿌리에 둔 언어를 사용하는 사용자들 간의 소통에 ‘번역’이 필요하다고 느껴질 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또한 방언의 개념이 아닌 타 언어의 등장으로 언어적 차원과 사람(언어사용자)-언어-사람으로 이어지는 관계가 나타난다. 작가는 작품 속에서 하나의 나라 안에서 타자성을 느끼며 익숙함이 곧 낯설음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작가는 아시아에 큰 관심을 가지고, 제주어뿐만 아니라 아시아 곳곳에서 사라지고 있는 언어를 찾아 나선다. 소수 언어들은 소멸되는 과정과 언어 사용자의 기억은 서로 유사한 부분을 가진다. 작가는 언어 사용자를 인터뷰한 영상 외의 다른 작품에서는 자막을 사용하지 않는다. 이는 그 언어만이 표현할 수 있는 것들과 언어가 가진 지혜가 언어가 사라짐과 동시에 없어진다고 여겼다. 관람자가 작품의 내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하고, 어렴풋이 짐작만 할 수 있게끔 만든 것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언어를 사용하며 당연하게 여겨온 것들에 의해 은밀하게 가려진 경계, 스스로 움직이는 경계를 의심한다. 

  작가는 이러한 언어의 번역 현상 속으로 직접 들어가 언어 사용자와 언어 자체를 마주한다. 그 지역에 일정 기간 머물며 제 삼자인 관찰자의 시점에서 질문을 도출해 낸다. 이 질문들은 다시 역사적, 사회적 맥락으로 확장되고 언어와 얽힌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아 작품을 만든다. 작가는 제주어를 넘어 동아시아의 소멸 위기 언어도 같은 방식으로 만나고, 깊은 관심을 보인다. 대만의 과거 주 언어였던 민남어와 객가어를 수집하는 등 일상에서 익숙했던 언어가 더 이상 익숙하지 않은 언어로 변해가는 과정과 언어로 알게 모르게 통제되었던 개인의 언어를 드러낸다. 이는 홍콩에서 현재 진행형으로 벌어지고 있으며 소멸 언어와 번역의 유사한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다. 작가는 사라질 예정에 놓인 언어들의 희소성과 특수성을 작가 특유의 섬세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언어 사용자들에게서 직접 발견하고 이끌어낸다는 독보적 작품 세계를 구축해 나간다.


[1] 김미진, 「제주 방언의 특징과 보존 방안」, 『인문학연구』, 28(2020), 87.

글: 한다영






제 3의 영역: 프레임을 깨뜨리는 공간

  ‘나’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아시아인, 한국인, 여성, 20대. 우리는 인종, 국적, 성별, 종교와 같은 프레임을 통해 자신을 정의 내린다. 이 프레임은 나 자신을 정의 내리는 걸 넘어서, 나와 타자를 구분 짓는 기준이 되고, 개인의 사고 과정에도 영향을 미친다. 각 개인은 틀 안에 갇혀 세상을 바라보고, 인식은 서서히 마비된다. 

  김우진은 프레임을 만드는 요인 중에서 특히 언어에 집중한다. 김우진은 ‘Memories Project’를 통해 대만의 만남어와 객가어, 홍콩의 광둥어, 한국의 제주어 등 사라지는 언어를 찾아 떠난다. 작가는 특정 지역에서 일시적으로 머물면서 언어가 소멸되는 과정을 관찰하고, 언어 사용자의 이야기를 수집한다. 타인을 알아가는 과정은 프레임이 만들어낸 마비된 인식을 찾고, 이에 균열을 꾀한다. 

  <한국어 받아쓰기 시험_다음을 듣고 따라쓰세요>에서 작가는 제주 토박이 할머니가 손녀에게 해녀로 살아왔던 삶을 이야기하는 걸 녹음하고, 외국어 듣기평가 형식으로 받아쓰기를 진행한다. 같은 국가라면 모두 같은 언어로 소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표준어 사용자인 작가는 할머니의 제주 방언을 제대로 받아쓸 수 없고,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제주어를 사용하는 이들의 전통과 삶은 제주어의 소멸로 인해 온전히 이해될 수 없다. 굳건할 거라고 믿었던 언어는 이제 언제라도 사라질 수 있는 것이 된다.

  ‘완벽한 결말의 서막’은 한국, 대만, 홍콩의 소멸하는 언어 사용자를 인터뷰한 작품으로, <완벽한 결말의 서막_K>에는 제주어 사용자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작가는 제주도에서20-30대와 40대 제주도민을 인터뷰하며, 각 개인이 제주어와 표준어 사용에 대해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이들은 학교에서 표준어 사용을 권장하고, 사투리를 많이 쓰면 무시당했던 경험을 이야기한다. 특이한 점은 표준어 교육이나 소수언어와 계급을 연결 짓는 지점 등이 소멸하는 다른 국가의 언어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났다는 점이다. 이로써 우리는 만들어낸 나와 타자를 구분 짓는 경계가 언제부터, 어떻게 비롯되었는지 의심해볼 수 있다. 

  김우진 작가는 우리의 틀 바깥에서 일어나는 것을 새롭게 인식하게 만든다. 개인의 프레임을 흔드는 작업은 마치 호미 바바가 말한 문화 번역처럼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나와 타자가 만나서 충돌하는 것과 같다. 프레임의 충돌은 ‘같은 국가 안에선 자유롭게 소통이 가능할거야’, ‘내가 쓰는 언어는 계속 유지될 거야’, ‘내 생각을 말하면 모두가 이해할 수 있을거야’와 같이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이 타자에겐 해당되지 않는다는 걸 깨닫게 만든다. 혹은 프레임의 충돌은 다른 존재로 여겨졌던 타자끼리 비슷한 점을 공유한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이처럼 김우진의 작업은 개인의 프레임에 가려진 것을 수면 위로 드러낸다. 수면 위로 드러난 나와 타자의 경계는 얇은 선이 아닌 넓은 지평으로 펼쳐진다. 이 공간은 ‘제3의 영역’으로 우리가 서로의 다름을 논의하고 이해할 수 있는 곳이 된다. 김우진의 작업은 ‘제3의 영역으로서, 관객들은 공간 안에서 타자를 이해하고 자신의 고정된 프레임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 김효진





나나와 펠릭스


구조의 틈으로 삐져나온 역설적 아름다움

  우리의 공간은 층층이 쌓여가는 삶이자 역사이다. 한 공간은 오래도록 그 모습을 유지하기도 하지만, 언젠가 변화하여 건물은 순식간에 철거된다. 우리는 살고 있던 집에서 떠나, 새로운 장소로 이주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또는, 한 공간에서 정착하면서 살던 집을 리모델링 하게 된다. 개인의 삶은 이처럼 거주 공간과 동떨어져 생각할 수 없으며, 개인은 장소를 기반으로 삶의 연속성을 느낄 수 있다.

  오늘날 삶의 공간은, 집에서 마을로, 더 넓은 범주인 그 지역의 문화로, 그 나라의 문화로 인식된다. 이동 수단의 발달로, 현대인이 사는 물리적 공간의 범위는 넓어졌으며, 정주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정착하지 않는 ‘노마드(Nomad)’ 주체로서의 개인도 넓은 장소를 경험하며 삶을 이어 나가고 있다. 건축물 같은 물리적 공간뿐 아니라, 우리의 삶에는 다양한 구조들이 존재한다. 우리의 사회와 문화 또한 다양한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구조들 틈 사이로는 비경계의 영역, 혼돈이 빠져나가는 방식으로 항상 존재한다. 나나와 펠릭스는, 이와 같은 구조들 속 흔들리듯 반짝이는 아름다움을 발굴하러 다닌다. 이들은 방랑하는 노마드적 삶의 움직임이 아닌, 탐험하는 ‘여행작가(artistic-traveller)’의 발자취를 남기고 있다.

  공간이 사람의 손길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고요하고 연속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 반면, 우리의 삶은 파편화된 순간들과 기억으로 구성되어 있다. 작품 <컨템포러리 수석>은 구조 속 흩어진 우리 삶의 파편이다. 우리의 삶이 담겨있는 가옥은 재개발 사업을 위해 부서졌다. 부서진 폐허 속에서, 흩어진 파편 조각들은 가옥의 각 공간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작가는 철거 지역에서 발견한 조각들을 임의로 가공하지 않음으로, 그 아름다움을 보존하는 방식을 선택하였다. 시멘트, 벽돌, 철근 등 각각의 파편 덩어리는 재개발 공간의 혼돈 속에서, 정제되지 않은 아름다움을 잘 보여준다. 나나와 펠릭스는 이러한 대도시 이면의 황량한 재개발의 풍경을 “무서우면서도 아름답게 느껴지는” 상태라고 표현하며, 이러한 역설적 아름다움을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우리가 마주할 새로운 대도시는 환대받는 것이며, 사라진 가옥은 배제된 것인가? 정주와 이주가 반복되는 공간의 변화는, 세월의 흐름을 맞이하며 층층이 쌓여가기도 하고, 그 연속적인 흐름은 한순간에 새로운 것으로 변화를 맞이하기도 한다. 환대와 배제의 반복, 연속과 단절의 경험은 이분법적으로 무언가를 정의 내리는 듯하다.

  이처럼 사회 속에서 경계 지어진 모든 것들은, 우리의 혼돈을 질서 있게 정리하는 인덱스 역할을 한다. 인덱스 속에서 분류된 것들은, 그 체계로 인해 혼돈이 순차적으로 해결되는 듯 하지만, 이러한 일반화와 경계 짓기의 과정은,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아 소외감을 느끼게 하거나 적정한 혼돈을 긍정할 수 없게끔 한다. 우리의 삶은 모순과 역설로 이루어진 것이기에 경계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비경계의 영역이 발생하며, 경계들은 서로 겹치고 연결되어 모호해지기도 한다. 어떠한 인덱스가 존재해야 전반적인 삶 속에서 혼돈이 통제되지만, 모든 혼돈을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적정한 혼돈이 있어야 구조 속 삐죽 튀어나온 아름다움을 포착할 수 있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경계 짓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 모든 것은 경계를 만들어 파편들은 연속적인 하나의 흐름으로 자리하며, 공간은 모호하지만 그 경계를 가지고 새로운 것으로 변화하게 된다. 우리는 새로운 것을 맞이할 준비가 되었는가? 익숙한 것에서부터 낯선 것을 발견하는 나나와 펠릭스의 시각은, 그동안 우리가 알지 못했던 것들을 마주할 수 있게 해준다. 이들의 작업은 우리의 삶 속 모든 것이 경계와 비경계, 연속과 파편, 단절과 통합이라는 환대와 배제 속 얽힘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글: 심선용






돌림노래는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지구는 둥글기 때문에 걷고 걷다 보면 결국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다는 동요가 있다. 누군가 선창을 하고 자연스레 같은 소절을 따라 부르는 이에 의해 완성되는 노래는 현시대의 모습과 똑 닮았다. 시작에는 끝이 있고, 끝은 시작을 부르는 다른 말이 되는 것처럼 고정된 것은 없고 경계와 경계는 맞닿아 있다. 그 역설적인 현상을 미적으로 현시하는 나나와 펠릭스의 작품을 살펴보자.

  먼저 <동창>을 처음 접하면 한눈에 미국 성조기를 차용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그러나 성조기가 표현된 방식은 한국의 전통 창호를 만드는 방법으로 한지와 미송 나무가 사용되었다. 이러한 내용과 형식의 아이러니는 각기 다른 문화 배경을 가진 이들에게 공감과 동시에 의문을 던진다. 이 작품은 10년 전쯤 핀란드 라디오 방송국에서 중국 문화원의 후원으로 꾸준히 방송된 중국 문화 배우기 캠페인 'Ikkuna Itäa n (Window to the East)’에서 시작되었다. 방송의 제목에 위화감을 느낀 나나와 펠릭스는 ‘동쪽을 향한 창문’이라는 뜻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에는 언제나 동쪽이 존재한다는 아이러니를 위트 있는 차용을 통해 부각하고자 하였다. 미국 등의 서방 국가에서는 한국을 비롯한 중국, 일본 등의 아시아가 동쪽에 있듯, 우리나라의 동쪽엔 역시 미국이 있다는 것이다. 과연 당신의 우편에 있는 것이 내가 떠올리는 것과 같은 것이라 확신할 수 있을까? 나나와 펠릭스는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모순 지점을 자신들만의 방법으로 노래하며 다음 소절을 우리에게 맡긴다. 

  이렇듯 동양과 서양을 구분 짓는 기준이 현재엔 관습적으로 굳어졌지만 사실 굉장히 상대적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의 동쪽에 존재하는 미지의 세계를 명명하던 East, 그리고 East의 카운터파트로 등장한 West의 개념. 단순히 지리적인 방향을 토대로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은 직관적이지만 분명 합리적이지 못한 부분이 있다. 이에 그들은 상대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편견을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를 바라봐 주는 유연한 시선이 필요함을 시사한다.

  같은 맥락으로 <꼴리산수자수병풍>은 핀란드의 대표적인 화가 에로 야르네펠츠(Eero Ja rnefelts)의 <꼴리 풍경화 Maisema Kolilta>를 모티브로 한다. 모티브가 되는 작품은 핀란드 동쪽의 국립공원 우코콜리(Ukko-koli)에서 바라본 오두막, 호수, 소나무 등의 경치를 낭만주의적으로 그려낸 풍경화이다. 이 아름다운 풍경의 이면에는 강대국의 침략에 맞서 민족주의적 정체성을 수호하고자 한 노력이 담겨 있다. 그러나 나나와 펠릭스는 역사적 사실에 한 번 더 파고들어 핀란드의 민족주의적 낭만주의를 이끈 이들마저도 외부에서 언어와 교육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과, 화면에 들판과 벌목 장소는 배제되었다는 사실을 꼬집는다. 특히 한국 전통 자수 기법인 솔잎수, 이음수, 평수 등을 통해 표현한 6폭 병풍인 이 작품은 이질적으로 번역하며 메시지를 더욱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핀란드의 동쪽에 위치하는 꼴리라는 국립공원이 소나무를 품고 있는 곳이라면, 한국의 솔잎수는 그 자체로 우리의 관념적 동쪽을 의미한다. 이처럼 한 작품을 바라보면서도 각자가 해석할 수 있는 ‘소나무’와 ‘동쪽’이라는 개념을 상이하게 떠올리게 된다는 점이 흥미롭다. 특히 직조 작업을 하던 펠릭스의 어머니 ‘렐라’에게 헌정하는 작품인 만큼 특별한 연관성 또한 찾아볼 수 있다.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바라보면 각 존재의 의미나 쓸모는 퇴색된다. 반면 역설적으로 권태롭고 익숙해진 현실에 필터를 씌우면 보지 못했던 디테일들이 머리를 들기 시작한다. 나나와 펠릭스의 ‘낯설게 만들기’는 우리에게 또 다른 번역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내가 알고 있다 믿던 것들에 의문을 제기하며, 멀고도 어렵다며 무관심했던 세계가 나를 비추는 거울처럼 느껴지게 만들기도 한다. 그렇게 나와 너, 이곳과 그곳이라는 단편적인 혐오감은 눈처럼 녹아 들어 언 땅에 스며든다. 

  나나와 펠릭스는 동양과 서양, 여성과 남성이라는 상이한 정체성을 갖고 그 요소들을 절묘하게 융합해 낸다. 그 과정에서 내용과 형식을 각각의 문화권에서 차용하며 독창적인 방식으로 재생산 하는 번역의 행위를 실천한다. 이러한 포스트프로덕션의 방식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미술사에서 빈번하게 찾아볼 수 있지만 나나와 펠릭스는 한 현상에 대해 깊은 고찰을 거친 후에야 마주할 수 있는 중간 지대에서 그 파편 조각을 수집하여 세공한다. 발터 벤야민은 자신의 저서에서 ‘번역’이 단순히 뜻을 옮기는 ‘직역’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였는데, 이때 번역은 순수한 이념의 경지를 향해 나아가는 행위이다. 결코 끝이 없으며, 원본과 번역물의 위계가 없다. 서로가 서로의 심지를 비추기 위해 존재하는 또 다른 원본이 될 뿐이다. 그렇게 더 나은 세계에 대한 소망을 담은 작품들은 마침내 원본 그 자체가 된다. 우리는 그들의 모순적인 시선에서 포착된 아름다움에 공감하며, 모방을 넘어서는 신선한 원본을 통해 또 다른 이야기를 생산해 낼 수 있을 것이다.

: 김영원





박기덕


고향과 외부인, 그 사이의 시선

  박기덕은 에너지와 국가, 지역공동체 간의 복잡한 관계를 탐구한다. 그 과정에서 사진과 영상 매체에 관한 질문과 고민을 공유하며 작업을 이어 나가고 있다. 작가는 밀양 송전탑 사건이 발생한 밀양 동네를 작업의 소재로 삼았다. 그는 자신의 고향이자 어린 시절의 추억이 담긴 밀양을 개인적인 애정을 담아 포착한다. 그러나 성인이 된 이후 줄곧 마을을 떠나 있었던 작가를 밀양 주민들은 경계 섞인 눈빛으로 바라본다. 그는 촬영 과정에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 반가움과 동시에 배제의 시선, 그리고 시간이 오래 지나 낯설게 느껴지는 고향의 모습을 복합적으로 경험하며 카메라를 잡는다.

  <고답마을, 고정 저수지>를 통해 작가는 밀양 송전탑 사건이 발생한 고답 마을을 외부인이자 내부인, 둘 다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2014 년 밀양시에 건설 예정이던 고압 송전선과 송전탑의 위치 분쟁으로 일어난 밀양 송전탑 사건은 고압선의 전자파가 인체에 미치는 위험으로 인해 문제가 되었다. 이에 따라 연중 농사를 짓는 밀양의 고정·고답·도곡마을 주민들은 고답 저수지에서 농성을 벌였다. 해당 사건이 발생한 지 9 년 후 해당 장소를 찾아간 작가는 평온하고 아름다운 고정 저수지의 모습을 카메라로 포착한다. 사회적 이슈가 되어 수많은 카메라의 포착을 당한 것도 잠시, 시간이 지난 후 더 이상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고요한 마을의 풍경이다. 작품을 감상하며 당시 많은 사람들이 의견을 주장하던 것과 달리 시간이 지난 후에는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현대사회의 모순점을 떠올리게 된다.

  과거의 사건으로 노골적인 관심을 받았던 밀양 주민들은 봉고차를 끌고 대포 카메라로 마을 풍경을 담는 박기덕의 모습에 기시감을 느낀다. 작가가 밀양에서 촬영한 시리즈 작업의 제목 ‘어디서 왔습니까'는 그가 밀양에서 가장 많이 들은 질문이었다. 낯선 얼굴의 남자가 카메라를 들고 동네를 여기저기 촬영하는 모습을 보고 밀양 사람들은 배제의 의도가 담긴 질문을 했다. 심지어 작가가 입 밖으로 내는 서울말은 밀양 사람들에게는 완전한 이방인의 표시였고, 이처럼 언어적 표현은 그를 이방인으로 낙인 찍히게 했다. 그러나 본인의 신원을 설명하고 친척과 조부모의 이름을 말하면 이방인에 대한 배제는 곧바로 환대로 바뀐다. 언어적 표현은 동시에 배제를 환대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

  <어디서 왔습니까 #02-06>의 흐릿한 초점과 화면 전체에 퍼진 노이즈는 카메라가 포착한 대상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게 만든다. 이는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작가의 기억과 유사하다. 어린 시절 뛰놀았던 마을을 다시 찾았을 때, 남아있는 흐릿한 기억이 중첩되며 현재 존재하는 장소를 객관적으로 선명히 볼 수 없게 한다. 오래된 기억의 휘발과 왜곡, 타지에서 생활하다 오랜만에 찾은 밀양의 모습을 작가는 이방인도 내부인도 아닌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이러한 그의 경험은 <어디서 왔습니까 #02-06>에 그대로 드러난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자신의 개인적 경험을 드러내 우리가 일상에서 취하는 환대와 배제의 자세에 대해 고민해 보게 만든다.

  해당 작품은 UV 프린팅 기법을 활용해 액자가 아닌 전시장의 벽에 인화된다. 액자 또는 캔버스에 사진을 배치하는 방식과 달리, 분사된 잉크가 곧바로 벽면에 부착되는 이 기법은 관람자로 하여금 작품을 입체감 없이 감상하게 만든다. <고답마을, 고정 저수지>가 입체감 있는 액자에 걸리는 것과 대비되며 <어디서 왔습니까 #02-06>는 전시장 벽면에 설치되어 마치 현실이 아닌 가슴 한 켠에 고착되어 존재하는 추억처럼 느껴진다. 이를 통해 과거의 기억과 현존하는 실제 공간 사이의 괴리감은 한 개인의 내면에서 크게 다가오기도 하며, 결국 어떤 공간을 완전한 외부인 또는 완전한 내부인의 시선으로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박기덕에게 밀양은 환대와 배제가 공존하는 공간으로, 이 곳에서 촬영한 사진 작업을 통해 두 개념이 가지는 이중성과 혼재성을 발견하고자 한다. 작가는 이 지역에 대해 친밀한 사적 감정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이 지역에 대한 자신의 관점이 편협한 외부인의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밀양을 떠나 있던 기간 만큼이나 그는 지역에 나타난 변화를 온몸으로 느끼지만, 이 변화가 이방인으로서의 시선에서 느끼는 것인지 불확실한 채 익숙하면서도 낯선 동네를 촬영한다.

글: 이린





경계 너머의 시선: 박기덕의 사진을 따라

  박기덕은 사진을 통해 특정 사건과 장소의 기록을 넘어, 관람객에게 사진 매체의 본질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사진은 현실을 기록하는 매체이자 작가의 주관적 선택이 개입된 것으로, 대상의 일부를 프레임 밖으로 배제하며 새로운 의미를 생성한다. 이러한 특성은 사진이 단순한 기록 도구가 아니라 작가의 세계관과 주체성을 담은 창작물임을 보여준다. 또한 대상과의 관계를 드러내면서도 새로운 관계를 창조하는 사진의 특성은 이번 전시의 주제인 배제와 환대에 대한 고찰과도 연결된다. 

  흑백 사진 <어디서 왔습니까 #10-02>는 외부인이자 내부인인 작가의 복합적 시선을 드러낸다. 사진 속 은발 어르신은 얇은 철 구조물 너머로 작가를 경계하듯 바라보며, 마을에서 외부인으로 인식된 작가의 경험을 보여준다. 얇은 철 구조물은 은발의 어르신과 보는 이 사이를 가로막아 시각적 장벽을 형성한다. 구조물 너머 작가를 경계하는 어르신의 시선은 보는 이에게 긴장감을 전달하며, 사진 밖의 관람객에게도 외부인의 시선으로 현장에 존재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흑백 톤은 화면에 거리감과 단절을 더하고, 흐릿한 실루엣은 전경과 배경의 경계가 모호하게 섞인 대기감을 만든다. 

  흑백 사진 <어디서 왔습니까 #09-28, 29>에서는 경계하는 시선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대신 작가는 주민들의 경계심을 피해 전동 휠체어 백미러를 통해 대상을 은밀히 바라본다. 눈빛을 마주치지 않고 촬영된 이 구도는 또 다른 형태의 경계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러한 시각적 연출은 작가가 마을에서 경험한 배제와 경계심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작가는 주민들의 시선으로부터 배제를 경험했다. 그들이 작가를 경계하는 듯한 모습은 사진 속 역광으로 그늘이 드리워진 얼굴, 흐릿한 초점 속 등을 진 모습과 어우러진다. 빛이 바랜 듯 뿌연 공기와 흐릿하게 잡힌 대상들 속 존재하는 시선들은 허공에서 교차되거나 흩어진다. 여기에서 주를 이루는 것은 이방인으로 작가를 대하던 어르신의 시선이다.

  그러나 작가는 이러한 경계를 사진을 통해 다시 바라보며 또 다른 시선을 대응한다. 또한  사진을 전시하여 작품의 배경인 송전탑 사건과 관련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해당 사건을 공유한다. 관람객은 사건의 외부인이자 목격자, 혹은 또 다른 내부인으로서 위치를 사유하게 된다. 사진 속 눈맞춤과 거리감이 있는 시선은 관람객에게 경계되는 대상이자 외부인, 즉 배제된 존재로서의 경험을 제공한다. 동시에 관람객은 전시장에서 환대를 받는 대상이자 작품을 통해 그들과 관계를 맺는 내부인이다. 이러한 상황은 동네에서 외부인이자 내부인이었던 작가와 어우러진다. 이를 통해 관객은 다양한 유형의 환대와 배제를 다층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작품의 배치 방식은 이러한 관계성을 강화한다. 일자형 벽면이 아닌 안쪽으로 꺾였다가 다시 나오는 구조는 관람객이 다양한 각도에서 작품을 바라보게 하고, 물리적 이동 속에서 시선과 관계를 재구성할 여지를 제공한다. 또한 작품이 다른 작품 위에 겹쳐져 있어 작품 간 경계를 드나드는 것처럼 보인다. 이를 통해 관람객은 특정 작품을 더 가까이 들여다보거나, 다른 작품을 배경으로 삼아 한 발 물러서며 새로운 관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이렇듯 전시는 단순히 송전탑 사건에 대한 기록을 넘어, 경계와 환대, 내부와 외부라는 다층적 관계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작가는 사진 속 시선과 공간을 통해 관람객이 각자의 위치에서 ‘내부인’과 ‘외부인’의 정체성을 번갈아 경험하도록 유도한다. 이는 전시의 주제인 관계의 경계, 경계를 넘어선 환대를 관객의 체험으로 확장하며, 관람객이 스스로 관계와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이어 나갈 수 있도록 여운을 남긴다.

: 김규원




이주영


해체된 언어, 열린 해석의 공간

  언어는 우리를 지탱하는 틀이다. 동시에, 이 틀은 스스로를 벗어나 자율성을 선언한다. 말과 글이 단순한 의미 전달을 넘어 행위와 물질로 변화하고 끊임없는 해석의 가능성을 열 때, 우리는 이 경계적 요소의 틈을 발견하게 된다. 이주영의 작업은 바로 그 틈에서 이루어진다. 의미와 비의미, 환대와 배제의 경계에서 그는 표현의 무한한 확장을 탐구한다. 오히려 언어는 독립된 존재로, 그 자체가 물질적 재료이자 행위로서 경험될 수 있는 대상이 된다. 

  <Works on Concrete Poetry>에서 다이어그램으로 표현된 언어는 방향성과 구조를 잃고 무한히 확장되는 열린 체계로 변화한다. 획일화된 방향성을 벗어난 선들은 끝없이 변형되며 새로운 기호적 가능성을 탐구한다. 이들은 독립적으로 증식하고 재구성되는 언어의 가능성을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이는 구체시가 단어의 의미를 해체하고, 기호와 형태로 새로운 맥락을 만들어내는 방식과 맞닿아 있다. 이주영은 ‘구체시(Concrete Poetry)[1]’라는 형식을 통해 언어를 시각적으로 풀어내며, 그 의미를 우리로 하여금 능동적으로 찾아가게 만든다. 

  <부서진 시>는 언어의 유동성을 경험하게 한다. 이주영은 의도적으로 불확정성을 남겨두는 방식을 취한다. 구체시에서 중요한 것은 언어의 흐름 속에서 발생하는 모호하고 불확정적인 공간이다. 단상을 오르내리며 우리는 작품의 일부가 되고, 작품의 의미는 우리의 행위에 따라 끊임없이 변형되며 그 안에서 스스로의 역할을 통해 완성된다. 이러한 과정은 언어의 본질적 자율성을 드러내며, 언어가 독립된 생명체처럼 움직이는 모습을 체감하게 한다. 

  <너머>에서 종이를 찢는 행위는 단순한 파괴가 아닌 새로운 가능성을 여는 과정이다. 찢어진 조각들 사이로 드러나는 여백은 언어의 물질적 성격을 드러내며, 이 틈 속에서 우리는 언어와 새로운 방식으로 조우한다. 종이의 파편들은 경험과 해석으로 채워야 할 빈칸으로 남겨진다. 작품을 마주한 우리는 그 속에 존재하는 의미를 완성하는 주체로서, 새로운 해석의 기회를 가지게 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환대와 배제라는 이중적 경계를 목격한다. 언어는 본래 맥락에서 분리되어 새로운 맥락으로 유입되며, 소통의 장을 열기도 하고 소외와 오해를 낳기도 한다. 이주영의 작업은 언어의 구조를 해체하고, 그 속에서 언어가 스스로를 재정의할 가능성을 탐구한다. 자크 데리다의 ‘차연(différance)’ 개념처럼, 작품 속 언어는 고정되지 않은 열린 체계로 존재한다. 데리다는 "차연은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차이와 연기(differing and deferring)의 행위"[2]라고 말했다. 이주영의 작업에서 언어는 바로 그런 차연의 과정 속에 있다. 의미는 끊임없이 지연되고 미끄러지며 여백과 파편 속에서 재구성된다. 

  이러한 언어의 틈 사이에서, 환대 받거나 배제된 것들은 새로운 여백으로 바뀐다. 언어의 여백과 틈은 결핍이 아닌 새로운 가능성을 품은 공간이다. 단일한 의미의 틀은 사라지고, 그 빈자리를 채우며 우리는 마침내 각자의 해석을 창조하게 된다.  



[1] 구체시는 시어에 이미지, 회화 개념을 도입하여 문자의 형태를 시각화 시킨 것을 의미한다. 구체시라는 개념은 1955년 스위스의 시인 어이겐 곰링어가 구체예술이라는 개념으로 알려진 미술사조를 원용하여 “단어와 문자들의 수열을 통해, 새로운 문자를 시의 구조적 방법을 통해 만들어지는 하나의 질서 단위체”라고 정의하였다.

[2] Derrida, Jacques. Margins of Philosophy.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2

글: 김해린





변모하는 언어가 향하는 무한의 길

  이주영의 작업은 발화되는 언어의 특징과 성질, 그리고 그 움직임에 대한 관심을 기반으로 한다. 작가는 행위를 실행하는 주체로서 자율성과 연속성을 지닌 언어, 그리고 그 언어가 촉발하는 힘에 주목한다. 상황과 맥락에 따라 변형되고 왜곡되는 언어, 힘을 드러내고 권력을 행사하는 언어, 그리고 청자의 행위를 일으키는 주체로서의 언어를 다루며, 그것이 이끄는 언어의 이면에 시선을 둔다. 

  언어의 자의성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언어에서 소리와 의미의 관계는 필연적이지 않다. 이 필연성의 부재로 언어는 텅 빈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언어의 자의성은 오히려 대화와 시간, 사람과의 관계를 표현하는 모든 것에서 자유를 준다. 안개 속에 있는 듯한 생각, 즉 추상을 구상으로 만들어내기 위해 존재하는 언어는, 모순적으로 그 생각이 청자에게 왜곡 없이 닿지 못하게 만든다. 수많은 단어 속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선택의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다. 이러한 선택의 반복과 중첩은 언어가 예상치 못했던 방향으로 흐르게 한다. 소통의 도구로써 기능하게 하는 언어의 자율성은, 왜곡과 변형을 만들어낸다.

  작가는 언어의 자율성과 연속성을 시각화 한다. 선택과 판단에 의해 자유롭게 흐르는 언어는 드로잉이라는 시적 기호로 환원되어 무한하게 확장되어 간다. 기호나 선, 점 등을 이용해 의미를 빠르고 강력하게 전달하는 다이어그램은 언어의 작동방식과 유사성을 보이며, 그 자체로 하나의 시각 언어로써 작업의 소재가 된다. 결코 처음이나 끝에 멈추어 설 수 없는 언어는 시작점과 끝점이 사라진 채 연속되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말하는 이와 듣는 이 사이에서 나타나는 차이는 시간과 공간에서 발생한다고 볼 수 있다.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시간과 공간의 차이에 따라 단어의 뜻과 내용, 발음, 사용법이 바뀌어 왔던 것처럼, 기원에서부터 멀어진 시간은 계속 새로운 공간과 만나며, 오늘이라는 시간대를 만들어낸다. 데리다는 언어가 발화된 직후부터 수많은 매체와 공간을 부유하며 변모하기에, 결코 기존의 의미를 지칭하는 충만한 현전을 갖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지금 여기에서 발화된 것을 듣고, 기록된 것을 읽는 것은 새로운 차이를 만들어낸다. 

  구어와 문자만을 통했던 과거와는 달리, 미디어가 발달한 현 시대의 언어는 더욱 다양한 매체를 투과한다. 미디어는 비교적 평등한 소통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불평등을 어느정도 해소해주는 듯 하지만, 사실상 사회정치적 담론을 포함한 수많은 언어로 가득 차 있다. 이러한 담론의 언어들은 특정 집단이나 관점에 대한 부정적인 표현이나 침묵, 편견을 발생시키며, 환대와 배제를 경험케 한다. 이처럼 언어는 단순한 의사소통의 수단이 아니며, 시간이 지날수록 권력 구조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데 사용되는 강력한 도구로써 작용한다. 

  작가는 작품을 바라보는 관람자의 동선과 행위에 대해 연구하며, 언어를 마주하고 표현하는 행위자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 화자와 청자 사이의 시공간에서 언어의 의미와 진실이 변화하고, 그 결과물로 언어와 권력이 행위를 통해 드러나는 모습을 형상화하기 위해, 작업에는 몸(신체)과 움직임이 포함된다. 이는 관람자가 나무계단을 오르거나 종이를 찢게 하는 등 언어에 물질성을 입히는 과정을 통해 표현된다. 

  이처럼 이주영의 작업은 자율성과 연속성을 가지며, 행위를 유발하는 언어를 다룬다. 작가는 환대하거나 배제하는 언어 뿐만 아니라, 그것이 향하는 언어의 새로운 이면에 관심을 가진다. 이분법적 경계를 만들어내기도, 무력화하기도 하는 언어의 두 가지 기능은 우리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준다. 전시 《무풍지대》는 환대와 배제의 경계를 해체하는 번역의 방안을 모색한다. 끝없이 변화하는 언어의 모습을 직면하고, 그것이 만들어내는 공존의 영토를 발견하게 될 것을 기대한다. 

: 신서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