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나와 펠릭스





<꼴리산수자수병풍>, 공단에 꼰사, 6폭병풍, 245 x 176cm(접었을때 46 x 176cm), 2023.




<동창>, 미송에 한지, 총 250 x 150cm(총 5부분; 각각 150 x 50cm), 2023.


  나나와 펠릭스는 각각 한국-핀란드 국적의 아티스트 듀오이자 부부이다. 두 작가는 모두 핀란드 알토대학원 예술사진학과를 졸업하여 2013년부터 지금까지 10여 년간 활동해 왔으며, 현재는 서울에서 활발한 작업 활동을 이어 나가고 있다. 최근에는 강원국제트리엔날레 2024,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기획전 ≪아아! 동양화 3부≫, 평촌아트홀에서 안양연고작가 공모 선정 작가로 기획/단체전에 참여하며, 2025년 12월 헬싱키 Muu Helsinki Contemporary Art Centre에서 개인전이 개최될 예정이다. 이들은 도시와 자연을 탐험하며 만나는 다채로운 풍경을 비교/차용하는 작업 방식을 주로 사용한다. 이때 ‘차이’로 비롯된 다양성을 변주하여 작품 속에 녹여내며, 한국과 핀란드라는 다른 문화의 교차를 통해 문화적 정체성, 사회적 가치관, 세계화의 의미를 탐구한다.




작가 인터뷰

Q1. 환대와 배제는 나타나는 형식보다 그것이 시작되는 마음에서 구별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마지못한 환대가 있는 한편 최선의 배제도 있는 것처럼요. 작가님은 타인을 맞이하고 배려하는 행동이 어떠한 기준으로 나뉘는 것이라 생각하세요? 또는 삶과 작품 속에서 어떠한 배제와 환대가 있었는지 이야기해 주세요.

  환대라는 단어의 정의를 사전에 찾아보면 ‘초대받은 손님, 방문객 혹은 외부인을 친절하고 포용력 있게 받아들이는 것’ 이더라고요. 그런데 그걸 뒤집어서 생각해 보면 환대가 일종의 배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 배려가 나와 동급이 아닌, 잠시 머물다가 갈 사람과의 계급적이고 임시적인 관계에만 적용되는 거니까요. 이건 굉장히 지속이 불가능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진정으로 우리가 서로 동등하다면, 상대를 환대와 배제의 틀 안에서 생각하지 않고 그냥 ‘무관심’해지는 게 필요한 것 같아요. 그리고 우리 사회에 그런 제3의 지대가 있다면 그건 바로 ‘관용’이 아닐까 싶어요. 관용 같은 경우 우리가 상대방을 단지 방문객이 아니라, 나와는 다른 사람이지만 계속 마주봐야 하기 때문에 용인을 하는 거죠. 생물학자 마크 엠 모펫(Mark M. Moffett)의 책 에 따르면 다른 척추동물이랑 차별화된 인간의 진정한 능력은 다른 사람을 무관심하게 대할 수 있고, 익명성의 사회에서 안전하게 살 수 있는 거라고 하더라고요. 그 책 첫 장에 쓰였듯이 마치 뉴욕에 진짜 큰 카페에 딱 들어가 앉아 있으면 세계 각국에서 온 별의별 사람들이 별의별 말을 쓰면서 앉아 있는데, 그 누구도 저 사람이 날 죽이지 않을까 생각을 안 한다는 거예요.



Q2. 우리의 삶은 크고 작은 모순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배제와 환대 등의 이분법적 요소들이 무력화되는 무풍지대가 존재하기도 하며, 그곳에선 아이러니하지만 자연스럽게 상반되는 개념들이 공존합니다. 이러한 모순과 역설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

  모든 사람이 모순을 갖고 있고, 이 사회도 모순된 걸 속으로 누구나 알고 있지만, 그걸 공공연하게 공표하면 사람들은 반감을 갖게 되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서, 특히, 우리나라 사회처럼 정말 깔끔하게 포장된 거를 계속 보여주고 싶어 하는 사회에서는 더더욱 그런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일반적”으로 보여지려고 노력하는 것 같아요. 분명히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는데, 현실과 거리가 먼 ‘좋은 이미지’만 계속해서 보여줘야 되는 거죠. 본인을 소개하는 이력서마저도 모순적이죠. 분명 삶을 살면서 실패한 경험도 많았을 테지만, 그걸 굳이 드러내지 않잖아요.

  저희 작품 중에 <동시대아파트속추상표현주의동양화>은 이 맥락에서 좀 확장되어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어요. 30년도 채 지속되지 않을 퀄리티의 콘크리트로 건물을 마구 함부로 짓고, 거기에 말도 안 되는 요상한 합성 외래어 브랜드 이름을 붙인 다음에, 그럴싸한 미니멀한 페인팅을 연상시키게 하는 무늬를 옆면에 그려 넣죠. 그런데 이것은 곧 한국에 사는 우리 모두가 평생을 바쳐 목표하는 투자 자산이 됐잖아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퀄리티에 허상의 가치를 부과하는 그 형상이 저희에겐 은유적으로 다가왔어요. 동시에, 어느 장례식장에서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세로형의 동양화 표구를 봤는데 위로 솟아 오른 아파트와 너무나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아파트 옆면을 사진 찍어서 표구에 집어넣으면 우리가 하고자 하는 얘기를 잘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많은 아파트의 브랜드 이름들이 길고 황당하기 때문에, 우리의 작품 제목도 그런 뉘앙스를 보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저희는 이렇게 작품뿐만 아니라 제목에서도 풍자적 요소를 집어넣기도 해서 제목을 작품의 굉장히 중요한 요소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Q3. 주로 비교와 차용의 방법을 통해 작업을 진행한다고 하셨어요. 상이한 개념 혹은 대상을 비교하는 행위는 자연스레 또 다른 번역의 과정이라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 과정에서 얻은 것들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철학자 크와메 앤서니 아피아(Kwame Anthony Appiah) 가 말한 것처럼 문화의 모든 것은 결국 다 훔치거나 빌려오는 것이고,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도 다 서로 영향을 받으면서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문화적 정체성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각 문화마다 어느 정도, 일정한 기간 동안 변하지 않는 부분도 있는 걸 인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문화라는 건 우리 모두가 계속 만들어내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반허구-반사실의 이야기를 우리 모두가 써 내려가며 서로 계속 대화를 나누는 것이 문화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이야기를 하는 행위 자체가 굉장히 중요한데요. 그 안에 잠재하는 근본적 욕구 혹은 의도가 무엇인지 늘 주의 깊게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예술가의 역할은, 현재 진행 중인 현실의 이야기를 정확히 포착해서 중간 점검하듯이, 다시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Q4. 작품들에 사용되는 매체가 굉장히 다양합니다. 사진과 자수부터 길에 버려진 기성품까지. 한 주제를 어떤 매체로 표현할지 선택하는 일은 어떻게 이루어지나요?

  처음 작품을 기획할 때 바로 매체를 정하지는 않는데요. 저희가 다루고 싶은 주제를 고민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시행착오를 거쳐 주제가 재료를 선택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그리고 저희는 작품이 ‘완성’됐다는 생각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전시 자체가 하나의 완성된 작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작품이 전시 공간 속에서 더 큰 주제와 이야기를 통해 숨 쉬게 되는 걸 좋아합니다. 그래서 전시를 통해 작품이 변형되기도 하고, 작품이 분리되거나 재조합되는 등 계속 새로운 시도를 하는 거죠. 예를 들어, <카메라, 담배, 위스키 그리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같은 경우에는 처음 포스코 미술관에서 선보였을 때, 핀란드의 공동묘지처럼 바닥에 액자를 쭉 세우는 방식으로 전시했었는데요. 당시 전시에 방문하셨던 한 관람자분의 반응을 반영해서, 이후에 안양 평촌아트홀에서 전시할 때는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달동네처럼, 언덕을 올라가는 형태의 액자들로 전시했습니다. 작품들도 그렇게 해서 다른 전시 방식을 통해 계속해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 같아요.



Q5. 작가 세미나 중 ‘그 어느 누구도 배제하지 않기 위한 노력이 역설적으로 발생시키는 배제’에 대해 언급하셨어요. 저도 그 부분에 대해서 요즘 생각해 보고 있거든요. 그런 아이러니에서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요?

  사회적으로 소외되어 왔던 계층, 즉 약자들을 적극적으로 포용하기 위해 시작한 ‘inclusive’ 혹은 환대, ‘hospitality’라는 지난 10년간 유럽 전반에 예술적 담론들의 중심이 되어왔는데요. 좋은 의미에서 시작한 키워드들이 점차 융통적이지 않는 극단적 목소리로 들릴 수 있다는 걸 경험했습니다. 그런 키워드를 다루지 않는 예술 활동은 역으로 차별을 받는 상황, 혹은 조금이라도 다른 목소릴 가지면 안 되는 분위기가 발생한다는 맥락에서 나온 이야기였어요. 앞서 말한 것처럼, 이방인에 대한 ‘환대’보다는,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지만 ‘관용’을 통해 같이 살아보자는 접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우리 스스로가 이미 이 질문을 하고 있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환대가 중요하니 이것의 중요성을 크게 외쳐야 한다’는 생각만을 하는 사람들은 이미 이런 질문을 안 하잖아요.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 자기의 이데올로기를 지키기 위해서, 스스로 질문을 하지 않는다는 게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해요. 조지 오웰이 말한 것처럼 자기가 가장 목숨을 바쳐서 믿는 신념 혹은 정말 소중하게 여기는 어떤 가치일수록 그것을 더 철저히 분석하고 객관적으로, 비평적으로 바라보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해요. 외골수가 되지 않게 계속해서 조심스럽게 들여다봐야 한다는 말이죠. 불교에서 얘기하는 ‘깨달았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그 사람은 바보’고, 무언가를 그렇게 계속해서 들여다보려고 하는 것부터가 이미 문제에 안주하지 않으려는 자세라고 생각해요.